수출 흑자에도 달러가 마른다? 환율 방어 어려운 진짜 이유
요즘 뉴스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하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분명 우리나라 기업들이 자동차도 잘 팔고 반도체 수출도 살아나서 '무역 흑자'를 냈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정작 환율은 1,400원 근처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니까요.
보통 우리가 알던 상식대로라면, 수출을 많이 해서 달러를 벌어오면 시중에 달러가 흔해지니 환율이 떨어져야(원화 가치 상승) 맞습니다. 예전엔 실제로 그랬고요. 그런데 지금은 이 공식이 완전히 고장 나 버렸습니다. 수출 흑자는 나는데 환율은 비상벨이 울리는 이 이상한 상황, 도대체 왜 벌어지는 걸까요?
단순히 "미국이 금리를 안 내려서 그래"라고 넘기기엔 우리 내부의 사정이 꽤 복잡하게 꼬여 있습니다. 시장에 달러가 돌지 않는 진짜 이유, 그리고 우리가 이제는 '고환율 시대'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구조적인 변화에 대해 아주 쉽게,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기업들의 태세 전환: 수출 흑자에도 '달러'를 잠그는 속사정
환율이 안 떨어지는 첫 번째 이유는 달러를 가장 많이 벌어오는 '주인공'인 기업들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예전 같으면 삼성전자나 현대차 같은 기업들이 수출 대금으로 달러를 받으면, 바로 은행에 가서 원화로 바꿨습니다. 직원들 월급도 줘야 하고, 국내 공장에 투자도 해야 했으니까요. 기업이 달러를 파니까 시장에 달러가 풀리고, 자연스럽게 환율이 안정을 찾았죠.
그런데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한국은행 데이터를 뜯어보니, 올해 3분기 기준으로 기업들이 외화예금 통장에 넣어둔 돈이 무려 918억 달러, 우리 돈으로 134조 원이 넘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역대 최고 수준입니다. 수출이 늘어난 것보다 기업 통장에 달러가 쌓이는 속도가 4배나 더 빠르다고 하니, 말 다 했죠.
왜 기업들은 달러를 시장에 풀지 않고 꽉 쥐고만 있을까요? 기업 재무 담당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합니다. "지금 세상이 너무 불안하다"는 겁니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무역 정책이 춤을 춥니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원화보다 '세계 공용어'인 달러를 현금으로 들고 있는 게 훨씬 안전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수도꼭지를 틀어도 물(달러)이 안 나오는 건, 수원지(기업)에서 물을 잠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서학개미의 대이동: '환율 방어'를 어렵게 만드는 새로운 변수
기업들이 달러를 안 내놓는 게 '공급'의 문제라면, '수요' 쪽에서는 더 폭발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우리 주변의 평범한 투자자들, '서학개미'의 등장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해외 주식 투자는 돈 좀 있는 자산가들의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대학생부터 직장인, 은퇴하신 부모님 세대까지 스마트폰으로 테슬라, 엔비디아, 애플 주식을 사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습니다.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정말 입이 떡 벌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 증권에 투자한 돈이 한 분기 만에 890억 달러나 늘면서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웠습니다.
이게 환율 방어와 무슨 상관이냐고요? 아주 밀접합니다. 우리가 미국 주식을 사려면 원화를 내고 달러를 사서 결제해야 하잖아요. 즉, 서학개미가 늘어날수록 외환시장에서는 24시간 내내 "달러 주세요! 달러 사요!"라는 주문이 쏟아지는 셈입니다.
국내 주식 시장이 박스권에 갇혀서 지지부진하니까, 더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미국으로 돈이 떠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머니 무브'가 결과적으로는 환율이 떨어지지 않게 밑에서 꽉 받치고 있는 강력한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달러가 마르는 구조적 원인: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다
자, 이제 조금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글의 핵심이자, 전문가들이 "환율 1,300원 밑으로 가기 힘들다"고 말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하나의 가계부로 생각해보죠. 우리가 1년 동안 열심히 반도체 만들고 차 팔아서 벌어들이는 돈(경상수지 흑자)이 대략 1,000억 달러 정도 됩니다. 꽤 큰 돈이죠. 예전에는 이 돈이 들어오면 나라 곳간이 넉넉해지니 원화 가치가 올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구조가 바뀌었습니다. 앞서 말한 서학개미들의 미국 주식 투자, 그리고 기업들이 국내가 아닌 미국이나 유럽에 공장을 짓느라 가지고 나가는 투자금(직접투자), 여기에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를 늘리는 금액까지 다 합쳐보니 어떨까요? 놀랍게도 우리가 땀 흘려 벌어오는 1,000억 달러보다, 밖으로 나가는 달러가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전문가들은 이걸 두고 "한국의 달러 사이클이 구조적으로 변했다"고 말합니다.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는 거죠. 버는 달러보다 쓰는(투자하는) 달러가 더 많은 구조가 굳어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수출 좀 잘된다고 환율이 뚝 떨어지길 기대하는 건 이제 욕심이 되어버렸습니다. 환율 1,400원이 단순히 '위기'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적응해야 할 '새로운 기준'이 된 셈입니다.
환율 1,300원대, 이제는 '뉴노멀'로 받아들여야
우리는 오랫동안 "환율은 1,100원에서 1,200원 사이가 정상이고, 1,300원이 넘으면 나라 망하는 거 아니야?"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고정관념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수출 기업들은 불안해서 달러를 안 풀고, 개인 투자자들은 수익을 좇아 미국으로 떠나는 이 흐름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없으니까요. 억지로 환율을 누르려고 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는 구조가 된 겁니다.
그렇다고 너무 공포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한국 경제가 단순히 물건만 팔던 나라에서, 전 세계에 투자를 하는 '선진국형 투자 국가'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일 수도 있습니다.
대신 우리의 재테크 전략은 수정이 필요하겠죠. "언젠가 환율 떨어지겠지" 하고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고환율이 계속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자산을 배분해야 합니다. 원화만 들고 있기보다는 달러 자산을 조금씩 모아가거나, 미국 지수에 투자하는 식으로요. 세상이 바뀌었는데 나만 예전 방식(환율 1,100원 기대)을 고집하면, 내 자산만 쪼그라들 수 있으니까요.
달러가 마르는 현상, 어쩌면 이건 위기가 아니라 우리 경제의 체질이 바뀌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통장은 이 변화에 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